대구 달서구지명유래2 소개
안녕하세요.
대구 룸싸롱입니다.
오늘은 대구 두류동과 본동의 지명 유래에 대해 한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구 달서구지명유래2
대구 달서구지명유래2 두류동(頭流洞)
역사적 기록을 통하여 보면 두류동은 둥글게 펼쳐진 산의 형세에서 유래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대구읍지』에 의하면 두류산은 ‘주산(周山)’으로 나타난다.
그 산이 둥글게 펼쳐져 있다고 묘사하여, ‘두리산’으로 불렀다는 이야기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1918년에 제작된 『조선지형도』에도 두류산(頭流山)으로 표시되어 그 유래를 뒷받침하고 있다.
1930년에는 두류산을 ‘원산(圓山)’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는데, 이 또한 산의 형세에서 유래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두류산의 유래라 전해지는 이야기가 두 가지 존재한다.
하나는 산의 형상이 사람의 머리와 머리카락을 땋아 내린 모양을 하고 있어 불렸다는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 시대에 성당못 안골에서 역적죄로 처형된 머리[頭]가 성당못으로 흘러갔다[流]는
끔찍한 이야기이다.
- 땅골(당골, 안땅골, 바깥땅골)
당골은 두류 3동에 형성된 자연촌락이다.
현 낙동강수원지 앞 동북편 산 아래에 소나무 3그루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당산목이었다.
이에 당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당골’이라 불렸는데, 당골이 경음화되어 ‘땅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 나무가 있던 동편 안쪽에 위치한 마을을 ‘안땅골(내당산)’이라 하였고 동남쪽(현 두류공원 야구장 서편) 아래 위치한 마을을 ‘바깥땅골(외당산)’이라 불렀다.
1887년 안땅골이 내당동이 되었으나 두류3동 일대는 지금도 ‘땅골’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5월 파종 후, 10월 추수 후에 술과 떡을 만들어 이 나무 밑에서 제(祭)를 올렸으며
이를 ‘당산제(堂山祭)’라 한다.
- 반고개
반고개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설은 고개 반쪽이라는 의미로서, 옛날에 성내로 시집온 성외 출신 새댁이 명절 때
차마 친정에 갈 형편은 안 되고 안타까워 고개 반쪽쯤에서 성외로 시집간 성내 출신의 새댁들과
안부를 묻곤 하였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설은 그리 고개가 높지 않은 고개라 하여
‘반(半)고개’라 불렀으며, 이것이 구전되어 ‘밤고개’로 변형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 곳 주민들은
이 고개 부근에는 오래전부터 밤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서 ‘밤고개’라 불렀다고도 한다.
그런가하면 반(半)고개, 밤[栗]고개가 아닌 방(榜)고개에 대한 유래도 전해진다.
성서, 다사, 하빈, 성주, 고령 등지의 많은 주민들이 대구 서문시장에 드나들면서, 이 고개가
마지막 고개라는 의미로 ‘막쭉고개’라고도 했는데, 많은 사람이 드나들어 방(榜)을 붙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고 하여 ‘방고개’라 불렸다는 지역민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본동(本洞)
- 가무내[甘勿川]
1470년부터 여산 송씨가 거주하기 시작한 이 마을은 동남쪽에는 당산 또는 학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큰 갓모양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이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마을 중심부로
작은 하천을 이루며 흘러 내렸다. 이 개천은 수질이 좋지 않다고 하여 ‘감물내[甘勿川]’ 라고 불렀는데,
이 ‘감물내’가 변하여 ‘가무내’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가뭄이 들었을 때 물이 흐르지 않았다고 하여
‘가문내’라 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가무내로 변했다고도 한다.
가무내는 ‘가매실’ 또는 ‘가매설’로도 불리기도 한다.
- 감천리(甘泉里)
감천마을은 가무내 서쪽에 있던 자연촌락이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사람이 마을 한가운데에 샘을 팠는데, 심한 가뭄에도 샘물이
마르지 않을 뿐더러 물맛이 차고 달아 샘 이름을 ‘감천(甘泉)’이라 불렀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이 마을 이름을 ‘감천’으로 불렀다고 전해온다.
- 학산(鶴山)
학산(鶴山)은 지금의 본동(本洞) 앞에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산이다.
예부터 ‘가무내’의 마을 이름을 따서 ‘가무내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근래에 와서 산의 생김새가 마치 학이 날아와 앉은 형상과 같다고 하여 ‘학산’으로 불리고 있다.
출처 달서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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